곰곰히 생각해보면 인생이나 삶이라는 것도 모두 시간에 종속이 되어 있다. 이놈의 시간이라는 것이 지금의 현재를 가리키는 순간에는 나에게 어떤 강한 힘을 가지지는 않는데, 흐를수록 지날수록 큰 힘이 되어 압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가지게 한다. 사실 일상의 시간이라는 것은 무책임한 나의 태도와 습관을 반영하여 흘러가는 것이기에 지나고나면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게 만들곤 한다. 갈림길이나 분기 앞에서는 선택적인 의지가 발동하고, 이에 맞게 결정하여 몸과 생각을 움직인다고 생각하여 왔지만 그게 정말 스스로의 의지인지에 대하여 물어보지 않을수 없다.

나. 하나의 사고하는 형상물인 나는 결정을 내리는 진정한 주체인가?

외부적으로 보여지는 나는 외모라는 외피의 특이한 형상을 띄고, 이 형상을 통해서 타인의 영상 이미지에 각인이 된다. 그 외에 습성과 태도, 말투, 혹은 일상과 업무 상에서 표출되는 다양한 비이미지화된 감각으로 추가적인 정보를 내보내고 있다. 이러한 수 많은 정보들도 그것 자체로는 '나'라는 형상이 빚어내는 실체를 보기보다는, 외부적인 요인과 비교 및 분석, 그리고 동시대의 관습과 평가 등에 의해서 가공되는 정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행위의 근간에도 이러한 정보가 스며들어서 '나'라고 불리는 형상물의 외피와 함께 저장되는 여타 정보의 내용물이 결정되어 진다. 이 특이한 외부 요인과 '나'는 지속적으로 동일 시간대를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나'라는 특이 존재의 결정이 '나'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인지 '나'는 궁금증을 갖게 되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

관계들과의 연관성을 천천히 되짚어보면, 연결고리의 애씀없이 그저 흘려보내는 일상이 주된 흐름이었다는 것과 철저하게 개인주인적이고, 게으른 하루에 만족하는 생활을 해왔기에 이것에 대한 인지는 하루의 일상사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인지하기 위해서 시각화하는 장면의 대부분은 하늘의 흘러가는 구름이나 길을 달리는 자동차나 끊임없이 재생되는 MP3의 LCD 재생 화면을물끄러미 쳐다보는것처럼 반복되는 일상의 지나간 잔상들을 계속 읽어댄다. 이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이 흐름의 끝에서는 '나'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가?

때가 있다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때를 맞춰서 일을 진행하고, 이를 받아들여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침, 점심, 저녁 세 끼의 식사를 하고, 아이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의 때를 맞춰서 그 때에 걸맞는 과정을 겪으려고 한다. 당시 사회가 보여주는 기본 규범에 맞게 '때'는 그렇게 맞춰지고 사람들은 그 과정을 잘 겪었는 지로 '나' 혹은 다른 이들의 사회적인 범위를 규정해준다. 특정한 때를 놓친 사람들도 있고, 혹은 때맞춰 잘 과정들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때'라는 것은 특정한 규범이 되는 것인가?

몇 가지 궁금한 일들에 대하여 질문을 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시간이 모두 지나가 버려서 '나'라는 존재가 '때'의 과정을 모두 거쳐서 이제 시간의 흐름이 멈추게 되면 나는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인가? 작은 방에 우두커니 앉아서 생각해본 그 시간의 멈춤은 단지 '어두움' 뿐이었다. '정지'. 사람들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불렀고, 어머니는 그것이 영원한 곳인 '천국'으로 가는 시작점이라고 불렀다.

탐욕스러운 하루. '나' 역시도 그 속에서 밤낮으로 눈을 꿈뻑이며,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역시나 지겨운 하루. 신호와 프로세스가 종료되기 전까지는 지속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프로그램처럼 움직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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