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나선 길에서 마주친 바람이 맵다.

모퉁이 길 위에 지난 주말 내린 비 웅덩이가 얼어 서서히 증발하더니
이제는 작은 얼룩이 되어 조그만 흔적이 되었다.

사람들은 두껍고 긴 패딩에 둘둘 말린 채로
마스크를 쓴 얼굴을 외투 가슴팍 사이로 푹 숙이고 황급히 길을 걷는다.

따뜻한 사무실에 앉아 일을 볼 때에도 밖의 찬 바람이 부는 소리에 멍해지곤 한다.

바람이 차다.

귀와 얼굴을 땡땡 얼게 만들어 버리는 해진 저녁 귀갓길 바람 속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더욱 길게만 느껴진다.

추운 겨울이 왔다.

 

선선한 바람

쏟아지는 빗살이 그치고 내리 쬐이는 낮의 햇살 가운데 서서 '입추도 한참 전이고, 이제는 가을이네요.' 라고 말했다.

태풍의 끝자락이라도 걸쳤는지 바람이 때론 거칠게 부웅 소릴 낸다.

슬며시 돌아가던 회전 연통도 달가닥거리며 지나가는 바람 따라 소리를 낸다.

하지만, 아직 가을은 오지 않았다.

여기에 있는 것.

'아주 잠깐만 있다가 곧 갈 겁니다.' 말해버린 건 실수가 아니었다.

은연중에 생각이 말로 흘러 나와버린 것이다.

지나가버린 아직은 따사로운 햇살 속의 휘익 소리를 듣는다.

붉고 노랗게 물들어가는 가을의 나무들이 보고 싶다.

가을이 멀지 않았다.

 

집으로 가기 전에 잠깐 들리라고 했다. 

 

사람들도 많고 복잡한 그 곳에 낮선 이들이 한가득이어도 내가 만날 한 사람, 아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사실 주변의 모든 것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철제 책상 맨 밑의 서랍에서 꺼내서 건내 준 종이 봉투 안에 든 빵과 우유, 그리고 몇 가지의 간식거리.

 

그 종이 봉투를 손에 든 채 들어가라는 이야길 듣는다.

 

버스 정류장에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리며,

손에 든 봉투의 빵 비닐과 과자 비닐의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흔들어 댄다.

 

해가 길어 졌는데, 해가 길어 졌는데

 

한강 변의 건물들 사이로 붉고, 노오란 주황색을 띄는 석양이 드리워진다.

 

손에 든 하아얀 종이 봉투.

 

버스에 올라타고 달리는 버스 창에 기대 강물 위로 비치는 저녁 노을의 반영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집으로 가는 버스 속에서 나는 눈을 뜬다.

 

그리운 이름.

 

이게 꿈이 아니었으면.

 

 

두해살이 노오란 달맞이꽃 따라
둥그런 달이 하늘에 떠 얼굴을 내밀고
야들한 달빛에 따사로운 듯 손을 쥐락펴락

누군가 웃음지며 소곤대는 소리에 깜짝 눈을 떠본다.

밤하늘에 별이 총총 떠 있고
귀뚜라미 소리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일고

 

보고 싶다 그려본 어둔 밤 하늘의 네 얼굴

기억도 희미한 그 얼굴을 동그랗게 그려본다.

 

손 끝에서 그려낸 네 얼굴이 내 기억 속에서 웃는 것만 같다.

 

네 얼굴이

네 모습이
마치 달처럼 하얗다.

 

 

어느 예쁜 아가씨
동그란 마카롱을 만드는 걸 보다가 갑자기


커다란 김밥, 울퉁불퉁한 김밥

어설프게 말아서 썰어 놓은 커다란 김밥을 꾹꾹 눌러담은 양은 도시락통
사이다 한 병과 어제 산 과자 두 봉지

봄과 여름 그 어느 사이에
소풍은 학교 뒷산으로 간다

친구들의 작고 동그란 예쁜 김밥이 부러워
아마 맛도 있을테지

내 김밥은 너무 커서
한 입에 먹을 수도, 들고 먹을 수도 없다

열린 도시락통 안의 김밥은 이미 터져 버려
김과 계란과 밥을 뭉쳐서 한 입
김과 시금치와 단무지를 다시 밥에 뭉쳐서 한 입

요리 못하는 엄마를 꾸짖으며 짜증내던 모습이 떠올라
끅끅끅 소리내며 어린 나에게 분노했다

해본적 없는 요리에 살림은 언제나 힘든 일이었지만
해야만 한다고 해내야만 한다고
삼남매 혼자 키우던 모습


그 예쁜 아가씨 동그랗게 만드는 모습에
다시 눈물이 왈칵

 

 

나이가 들어 소유도 지식도 무료해질 무렵

새로운 것마저도 시큰둥해진다.

예측 가능한 또는 더는 형식이나 의미가 새로운 것이 없는 위기에 빠진다.

하지만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혹은 관념상으로 지녀왔던 사고의 틀을 부숴버리는 파격 앞에서는 한 없이 주저하게 된다.

나는 그것이 나이가 듦 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 끝을 알 수 없었기에 마음 졸이고 두근거렸던 일상 속의 일들이

그저 바닥 위에 펼쳐진 수천 번 맞춰 보았던 몇 조각 짜리 그림 퍼즐처럼 지루해져 버렸다.

무지함이 주었던 어설픈 충동도 오만함이 주었던 어리석음도 꽤나 정겹게 느껴지곤 하는 것이다.

바보같은 생각이나 행위였더라도 두근거렸던 일들이 먼 일들이었던 것만 같다.

그 시간들 속에서 하나둘 사라지는 존재들, 그리고 예정들

존재의 부재가 주는 이 커다란 허함을 희끄므레 그려보며 시간의 흐름 앞에서 멀거니 하루를 또 보낸다.

 

늘 있던 것이 계속 있던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라는 것이 흘러간다고 살면서 인지하지를 못했습니다.

사소한 선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해야하는 순간까지

단순한 실수가 하나 또는 저절로 일어난 문제가 하나 더 쌓였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때때로 명민하게 판단하고, 본질에 다가서곤 했다고 느꼈습니다.

 

어느 날

평소와는 다른, 아니 너무 먼 기억처럼 느껴지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혼자만의 의지로 예전처럼이라고 기억하는대로 움직여 보려 합니다.

하지만 시간은 그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흥얼거립니다.

말을 흥얼거립니다.

마치 이것은 노래와 같습니다.

 

감춰진 진실은 '나의 시간이 흘러갑니다'라는 것입니다.

 

아!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을

 

자꾸 떠오릅니다.

하얗게 웃으며 노랠하던 날이

말이 노래가 되어 상대를 불러보았던 기억이 

피부를 밝히듯 어깨 위로 떨어지는 따가운 햇살이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똑똑똑...


지금?


나를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군가 싶어 문을 열어 본다


끼익


잘못 들은 것일까?


왜일까, 누구의 두드림


검붉어진 하늘과 저녁 식당의 창가에서 잠시 눈이 마주친 갈색 고양이


물끄러미 서로를 쳐다본다


눈을 깜빡여 본다


짐을 꾸려야 한다


설령 도달할 무엇이 없더라도



"살아온 날들이 꿈 속만 같다."



언제 어떻게 태어났는지는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을 통해 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활발하고, 생기가 넘치는 아이였다고 했다.


하얀 피부와 큰 눈을 가지고 있었고, 웃을 때마다 볼이 살짝 올라가 달덩이 같은 미소가 이쁜 아이였다고 했다.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구경하기를 좋아했고, 밖에서 노는 것을 그리 좋아했다.


막내로 태어나서 늘 사랑을 받았고, 어머니 아버지 말씀을 한 번도 거역하지 않아 매를 맞은 기억이 없었다.


내가 해야할 일이 있으면 늘 열심히했고, 아는 것 모르는 것을 따지지 않고 보고 읽고 쓰려 했다.


어린 나이에 학교에 가서 늘 공부가 어려웠지만 한 번도 학교를 떨어지지 않았다.


친척들과 친구들이 주위에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고, 사람과 사람들의 만남에서 행복함을 느꼈다.


삶의 많은 것들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며 노래했다.


언제나 많은 이들로부터 구애를 받았고, 애정을 받았고, 그러한 일상이 원래부터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그 넘치는 애정을 누구나에게 모두 나눠주고 싶었다.


항상 자신이 있었다.


지지 않을 자신.


더 행복해질 자신.



천장의 무늬들이 하나 둘씩 보인다.


감았다가 뜰 때마다 그 무늬가 너무 선명하여 머리가 아플지경이다.


'아, 너무 하얗다.'


말하지 못하는 잠수종에 갖힌 환자처럼 말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다.


들린다.


희미하지만 말과 주변의 소음들.



고개를 그덕여 본다.


'그래, 그래'


너는 누구인가? 왜 웃으며, 혹은 울며 내 옆에 머물렀다가 다시금 사라지는 것인가?


'아프다.'고 말을 해본다.


'정말 아프구나.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게 너무 아프구나.'



눈을 떠본다.


어두운 방 안의 하얀 천장이다. 어제, 그제, 그리고... 계속 봐왔던 그 천장.



'아~, 살아온 날들이 꿈 속만 같다.'




"키미는 벙커 속에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려고 노랠 부르던 중,

푸르른 날 오후에 인디애나주의 SWAT 팀에 의해서 구조되었다."



잠시 잠들어 있던 순간 꾸었던 꿈의 기억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좋은 꿈이었던 고함을 크게 내지를 정도로 끔찍했던 꿈이었던 일어난 순간 잠시 머물렀다 사라졌던 것에 비해서, 방금 꾼 이 꿈은 그 여운이 가시지 않은 채 따뜻한 온기처럼 남아 있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가끔 '생생한 꿈을 꾸었다'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꿈을 꾼 것 같았다.



눈을 뜨고 바라본 천장은 오월의 따스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고, 다시 감은 눈 속으로 하얀 눈이 내리는 풍경의 잔상이 보이는 듯 했다.


날이 푸른 어느 오월 주말의 낮잠은 나에게 이처럼 기분좋은 온기를 남겨주었다.


하얀 눈이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하늘에서 내리고, 그 소곤대듯 떨어지는 눈 사이로 마당 위로 내리는 눈들이 슬며시 하얗게 세상을 물들어 가고 있었다.


디딤돌 위에 벗어놓은 신발 뒤로 쌓인 눈이 선을 그은 듯 처마 밑 댓돌 주변을 돌아 쌓여가기 시작하면서 집과 마당에 무채색 화폭의 경계를 만들어 갔다.


그냥 멀건히 하늘을 쳐다보다가 내가 하늘 속에 빠진 것인지, 눈 내리는 풍경 안으로 들어와 있는 지 모를 그런 기분이 들어 마루에 앉아서 바로보는 눈 앞의 풍경에 온 몸의 긴장이 사라져 버렸다.


이 풍경은 수묵화로 그려야 제 맛이 날 것 같은 그런 하늘, 그런 풍경이다. 밝은 회색의 하늘에서 점점이 떨어지는 눈과 그 눈이 만들어 낸 저 멀리 있는 산과 들판이 하얀 색상의 물감을 톡톡 뿌려놓은 듯 하다.


이 서늘하게 잠든 고양이 숨소리 마냥 내리는 눈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다가 문뜩 마루에 앉아 있는 것이 나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눈을 피해서 온 건지 노루와 사슴, 토끼와 다람쥐, 늑대와 여우, 매와 꿩, 이름모를 많은 새들과 작은 온갖 산과 들의 짐승들이 마루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너무 눈 내리는 눈 앞의 전경에 취해 녀석들을 눈치 채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나 보다.


눈 내리는 마당에 발자국 하나 없는데, 어떻게 이 마루에 모두 모여 눈 내리는 풍경을 같이 하게 된 것일까?



짧게 잠든 듯 했는데, 아니 아주 잠시만 마루에 앉아 눈 내리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많은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상쾌했다.


마치 내일, 누가 찾아온다고해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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