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일이다.

뿌찐과 메드의 이미지를 조목사님과 이목사님에게서 보았다.

9시 예배를 얼마만에 드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담임목사의 변경 이후 9시와 11시는 이제 조목사님이 설교를 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담임목사라는 타이틀은 이제 이목사님이 맡으셨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담임목사이면서도 담임목사로써의 인식보다는 대리의 인식이 그 저변에 깔려 있는 듯 보였다.

이 교회의 주인은 다른 사람, 혹은 이 교회의 주체는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되어 있고, 그럴 것이라는 인식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과 성도들이다. 목회자는 섬김으로써 그 역할을 다해야 한다.)

메드는 뿌찐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그 어떤 정치적인 배경도 없이 가장 젊은 대통령이 되었다.

160이 조금 넘는 단신의 삐쩨르 출신, 뿌찐의 후배, 그의 가장 이야기를 잘 듣는 젊은 정치인.

선한 이미지의 한 젊은 정치인이 러시아를 이끄는 대통령이 된 것이다.

서대문 시절부터 C.A 아동부를 거친 이목사에서게 왜 그 이미지가 보였던 것일까?

그 뒤에 서있는 뿌찐의 이미지를 왜 조목사님에게서 느꼈던 것일까?


리더쉽. 당신의 물음표.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하지 마세요.' 라고 이야기한 한 목사님을 다시는 교회 강단에 부르지 않았다고 자랑하듯 이야기하였다.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것은 보혈의 십자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하였다.

시국의 아픔이나 이 땅의 슬픔에 대하여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주신 작은 메타포는 '믿음, 소망, 사랑...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고 생각한다.

본인에게 주어진 고난과 슬픔을 다른 사람이 지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 들인 것이다.

나의 십자가를 기억하라고 하지도 않았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방인이든, 아니든 그 '사랑'으로 타인을 배척하지 않고, 유대인의 닫힌 세상을 열어 보인 것이다.


당신의 물음은 무엇인가?


때때로 우리는 신앙을 강요당한다. 리더들의 사고에 긍정해야 하고, 리더들의 결정을 존중해야 하고, 리더들의 이야기에 따라야 한다고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당한다.

과연 물음표를 가지는 것은 신앙인으로써 가져서는 안되는 것인가?

내가 가진 물음표에 다시 언젠가 느낌표를 하나더 붙이기 전까지 인생의 탐구를 거쳐서는 안되는 것인가?

우리는 스스로에게 되물어볼 때가 되었다.

크리스찬 스스로가 만들어 낸 신앙의 정형화된 틀, 혹은 너무나도 작은 믿음의 범위라는 것을...

정말 아침의 따스한 한끼 식사를 주심도 감사하고, 타인의 아픔을 느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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