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하니 계단을 걸어내려오면서 가서 해야할 일, 그리고 사야할 목록을 생각해봤다.


몇 가지 안되는 것들이지만 자꾸 되뇌다보니 내가 뭔가 하나를 빠트리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이 몰려왔다. 


건물의 현관을 벗어나서 이미 어두워진 아스팔트를 걷다보니 무거워진 다리에 힘이 풀리고, 발을 힘들게 내딛으며 지구의 중력과 몸이 앞으로 향하는 관성에 이끌려 걷고 있는 나를 느꼈다.


'뭐, 괜찮을 거야.'


막연하게 중얼거리는 것에 대한 확신이나 증거는 없었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다.


그간의 시간 혹은 희미해진 기억, 지금의 내가 살고 있는 현실과 지나온 과거가 아주 작은 불빛마냥 타고 있는 것 같다.


살아있는 나는 바로 앞의 비춰진 길의 한 걸음까지만 볼 수 있는 자그맣고 희미한 빛이다.


시간이 빚은 작고 흔들리는 희미한 빛.



붉은 벽돌로된 담을 걷다가 라일락 향기에 잠시 고개를 들어본다.


어두운 밤 하늘을 배경으로 담벼락 너머의 하얗게만 보이는 작은 꽃들이 모여 진한 향기를 뿜어대고 있다.


너무 가까이가면 머리가 아플 정도로 강렬한 향기가 코를 자극하고, 몇 걸음 떨어져 있으면 은은하게 향을 맡을 수 있다.


거리가 주는 향의 깊이, 강렬함, 화사함.


사람없는 골목에서 행여 내 작은 불빛에 향기 담길까 싶어서 담을 살짝 넘어온 라일락 나무 아래 서서 나무를 올려 본다.


4월의 라일락이 핀 담 아래서 그렇게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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