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그렇습니다.
타이거즈는 뭔가 했다하면 기록이군요.
좋은 것도 아닌데...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장시간 경기를 기록했습니다!
ㅜ.ㅜ

무승부는 어짜피 패배인걸...
최희섭 선수의 스트라이크 판정이나 8회 김상현 선수의 스트라이크 판정이나 뭐...좋다.
공 하나 둘 억울하지만 그런 판정이 시합에 몇 개 정도는 나올 수 있다.
그것이 의도이던 아니던...

하지만 시합의 향방을 가를만한 명백한 편파 판정이 나왔다.
오심이 아니라 자의적인 편파 판정으로도 볼 수도 있는 상황이라서 당황스러움이 두 배이다.

7회 1아웃에 2,3루의 찬스를 잡고 3루에 있던 이종범 선수가 김원섭 선수의 짧은 우익수 플라이때 홈에 들어오다가
박경완 선수가 다리로 홈플레이트를 블록킹 하던 것을 피해 슬라이딩하면서 팔을 안쪽으로 넣어서 플레이트를 찍고 당겼다. 이는 이종범 선수가 양 측의 부상을 우려하여 순간적으로 벌인 신기에 가까운 순발력으로 충돌없이 이종범 선수는 홈에 슬라이딩을 했다.


포수가 글러브에 공을 받는 순간에 이미 이종범 선수의 손바닥은 홈플레이트를 찍고 있었고,
주심은 뒤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
(이걸 못봤다는 것은 말도 안돼며, 태그는 고사하고 타이밍 상으로도 몸은 이미 들어온 상태였다)

그런데, 조금 뜸을 들이다가 아웃 판정을 내렸다.
이거 보는 순간 모니터를 내려칠 뻔 했다.

아무튼 이런 어이없는 편파 판정 혹은 오심이 지금 KBO를 넘실거리고 있는데, 정작 KBO는 수수방관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벌금 몇 십만원으로 이런 중대한 오심이 해결 될 것이라고 보는가?

경기장을 찾은 수만의 관중과 중계를 보면 수백만의 시청자를 우롱하고,
승리투수 요건을 갖추기 못한 선수에게 승리를 선사하고, 정당한 플레이어의 타점과 득점을 빼았아 갔으며,
게임 진행과 흐름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오늘 관련 기사가 올라왔길래 기사들을 클릭해보면 모두 아래와 같이 제공사의 요청으로 삭제되었다고 나온다.
이거 누가 그랬을까? 누가 제공사에게 압력을 가해서 삭제하도록 했을까?
이럴만한 곳이 어디에 있을까?


부끄러운줄이나 알아라.

아...박찬호의 시범 경기 2승의 소식이 들리자마자, 제 5선발로 확정이 되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그것도 만우절에...우왕굿

거기다가 찬호 도우미로 LA 다저스에서 활약했던 게리 쉐필드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는 뉴스!
필리스는 게리 쉐필드도 꼭 꼬셔서 데리고 오길...



다음의 '너하나만'님이 정리한 시범 경기 찬호 기록
마이어의 체인지업을 익힌 박찬호가 구속 회복과 함께 꾀나 위력적인 투구를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타자 친화적으로 알려진 시티즌 뱅크 파크가 좀 걱정이지만, 볼 배합을 통한 삼진의 증가와 공격적인 투구를 통한 볼넷의 감소 등등 전반적인 투구의 안정감을 계속 보여주고 있어서 더욱 기쁘다.

범위 20이닝 이상, 조사 대상수 65명(한국시각 3월 31일 기준) 

 구분

박찬호 

ML 순위 

NL 순위 

ML 1위 성적 

 이닝

 21.1 

 51위 

SF 케인 28.1 

 방어율

 2.53 

 15위 

 10위 

PIT 올렌도프 0.87 

 피안타

 20개 

 20위 

 13위 

ATL 가와카미 13개 

 피홈런

 1개 

  9위 

  4위 

DET 벌렌더 0개

 볼넷

 2개 

 공동 2위

 공동 1위 

MIN 슬로위 1개 

 삼진 

 25개

 공동 3위 

 공동 3위  ARI 하렌 29개 

 출루율

 .262 

 9위 

 7위 

PHI 블랜튼 .217 

 장타율

 .354 

 공동 18위 

 9위 

DET 벌렌더 .178 

 WHIP

 1.03 

 공동 12위 

 공동 9위 

PIT 올렌도프 0.77 

원문 - http://bbs.sports.media.daum.net/gaia/do/sports/bbs/group2/mlb/read?bbsId=F002&articleId=9553

국내 공중파 및 케이블에서 MLB 방영 계약이 된 곳이 없어서 방송으로 보기는 좀 힘든 상황인데, 어떻게 될 지 잘 모르겠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MLB.com의 인터넷 송출도 한국 쪽은 안되는 것처럼 이야기 하던데.

시티즌 뱅크 파크에 가서 찬호 선발 경기 보고 싶구나!
일단 주말에 기아와 두산의 개막전이나 보러가야 겠다.


약간의 상실감과 아쉬움.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했던 선수들, 코치님들이 더 했겠지만
나 역시도 녹초가 되어 무언가 알 수 없는 아쉬움 또는 허전함을 느껴야 했다.



시합 중에 주심의 석연찮은 볼 판정(한국 투수와 일본 투수에게 스트라이크 존의 범위가 달랐다)이 눈에 보였고,
2루심의 세이프 판정에 아쉬운 부분이 2번 정도 있었다.

그리고, 일본 선수인 나카지마의 지저분한 수비와 주루로 보는 내내 불쾌함을 지울 수 없었다.

시합이 끝나고 나서 봉타나가 울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대회 기간 내내 너무너무 멋진 플레이를 보여줘서 고맙고, 건강하게 잘 돌아와 주었으면 한다.

아...보는 나도 이렇게 지쳐 버렸다.

1955 년부터 1997년까지 해마다 여름이면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이 한국을 방문해 친선경기를 가졌다. 재일동포 야구인들에겐 조국을 발견하는 기회였고 한국야구로선 선진야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야구는 기록과 역사의 스포츠다. 1964년 9월 25일 대통령배 실업리그에서 김영덕(대한해운공사)이 기록한 퍼펙트게임을 4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할아버지와 손자가 공통화제로 삼을 수 있는 건 야구가 지닌 역사성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슬픈 전설이 있다. 재일동포 야구단이다.

한국전쟁으로 정체를 거듭하던 국내야구계에 새로운 야구이론과 기술을 전수하던 재일동포 야구단은 1997년을 끝으로 야구연감에서 사라졌다. 장훈, 김성근, 배수찬, 김박성, 황진환, 박귀홍 등 훗날 한·일 야구계의 거목으로 성장한 대스타들이 재일동포 야구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찾았다는 사실조차 잊힌 지 오래다. 

< 스포츠춘추>가 야구역사를 조명하기 위해 수차례의 일본 현지 취재를 통해 ‘슬픈 전설’의 뒤를 밟았다. 귀화하지 않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일본시리즈 우승멤버로 활동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전 감독 한재우(73,일본명 니시하라 교지)씨의 인생을 되짚는 방식으로 ‘슬픈 전설’에 접근하려 한다. 기사는 총 5편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1969년 일본 오사카 재일대한야구협회 사무실 앞. 5월인데도 대기는 세계의 냉장고를 모두 개방한 듯 차가웠다. 바람도 예사롭지 않아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몸이 오그라들었다. 
“날씨도 이런데 그만 둡시다.”
가뜩이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한재우였다.

“어허, 한 선생. 그쪽에 이미 간다고 알렸는데 여기서 없던 일로 하면 큰일 나요. 큰일. 그러지 마시고 눈 ‘딱’ 감고 다녀옵시다. 한 선생이 아니면 이 일을 성사시킬 사람이 없어요.”
재일대한야구협회 관계자가 돌아서려는 한재우의 팔을 잡았다. 어찌나 팔 힘이 센지 한재우가 ‘앗’ 하고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손 쳐도 그렇지. 어찌 명예가 목숨인 야구인이 야쿠자를 찾는단 말입니까. 사정이 급해도 이건 아닌 듯합니다.” 한재우가 관계자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등을 돌린 순간. 뒤에서 나지막한 절규가 들렸다.

“한 선생. 그럼 아이들은 어떻게 합니까. 모국방문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들은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모국분들은 또 어떻고요.”

태엽이 다 풀린 장난감처럼 한재우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도리 없는 일이었다.

은퇴한 야구선수, 다시 그라운드에 서다

1936 년 일본 오사카 태생의 한재우는 재일동포 2세다. 일본명은 니시하라 교지. 본적은 경상남도 고성이다. 참혹하리만큼 못 먹고 못 살던 시절 한국인 아버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갖은 핍박과 차별을 견딘 끝에 야구선수가 됐다.

오 사카부립 기시와다 고교 재학 시는 왼손 투수로 간사이(관서)지방에서 명성을 떨쳤다. 1956년 고교 졸업과 발맞춰 여러 팀의 구애를 뿌리치고 명장 미하라 오사무 감독이 있던 니시데쓰 라이온즈(현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기시와다 고교 졸업생 가운데 최초의 프로야구 입단자답게 당시 그의 몸값은 100만 엔에 가까웠다. 초고교급 대우였다.

입 단 시는 훗날 ‘하느님, 부처님, 이나오님’으로 유명해질 동기생 이나오 가즈히사보다 더 큰 기대를 모았다. 1957년 일본시리즈에선 중간계투로 출전해 팀 우승에 한몫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선배에게 구타를 당한 뒤 갈비뼈를 다치고 왼쪽 어깨부상이 겹치며 기대만큼의 성적은 올리지 못했다. 개인 통산 3승 7패 평균자책 3.35가 6년 동안 프로에서 뛰며 그가 남긴 기록이었다. 

1956 년 니시데쓰 라이온즈 입단 당시의 한재우(사진 뒷줄 맨 왼쪽). 그를 어깨동무하고 가운데서 환히 웃는 이가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투수 5인 가운데 한명으로 꼽히는 이나오 가즈히사다. 입단 동기생인 둘의 우정은 평생 이어진다(사진=스포츠춘추)

1961년 은퇴 뒤는 오사카에서 미즈노 스포츠용품점을 운영하며 청년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러나 그가 손에서 놓은 줄만 알았던 야구는 정작 그를 놓지 않고 있었다. 그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조국도 마찬가지였다.

“1962 년 여름, 가게로 이즈미사노시(市) 한국 거류민단(민단) 관계자 몇 명이 찾아왔네. 무슨 일로 왔나 했지. 뜬금없이 10월 한국 대구에서 전국체전(전국체육대회)이 개막한다고 하는 게야. 재일동포들도 참가를 하기로 했다는데 야구는 가겠다는 사람이 많아서 일본지역 예선전을 치른다지 뭔가. 나보고 이즈미사노시(市) 동포 야구선발팀에서 뛰어달라고 하더라고.”

한 재우는 정중히 거절했다. 왼쪽 어깨를 다쳐 공을 잡을 수 없을 뿐더러 한창 바쁠 때 가게를 비우고 한국에 갈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민단 관계자들은 “투수 이외의 포지션에서 뛰어 달라”며 통사정을 했다. 요지부동이던 한재우의 마음을 되돌린 건 “이번 기회에 모국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어머니의 설득이었다.

결 국 한재우는 이즈미사노시(市) 동포 선발팀에 합류했고 전국체육대회 일본지역 예선전에 참가한다. “아마 나고야 동포 청년회팀이랑 결승전을 벌였을 거야. 거기서 우리가 사요나라(끝내기) 안타로 이겼네. 이즈미사노시(市) 동포 선발팀이 재일동포 대표로 전국체전이 열리는 대구땅을 밟게 된 게지."

한재우의 기억에 의하면 재일동포 대표팀의 유니폼과 용품은 이즈미사노시(市)에 위치한 사카도모 방직 주식회사의 서갑호 씨가 사재를 털어 지원했다.

첫 모국방문으로 설렐 법도 했지만 재일동포팀은 각계의 지원과 정성을 생각해 경기에만 집중했고 결국 우승컵을 안는데 성공했다.

“ 지금도 전국체전 폐막식 때 들었던 노래가 귀에 선해. 무슨 노래냐고?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래 시작하는 노래가 있잖은가. 그때는 내가 한국말을 거의 몰랐다고. 그냥 멜로디만 들었지. 그런데 이상하게 귀에서 노래가 안 떠났네. 어느 노인네가 나를 ‘꽉’ 안아주는데 희한하게 눈물이 나지 뭔가. 그때 처음으로 ‘아, 이게 민족애인가 보다’ 생각했지.”

이때를 경계로 한재우는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전국체전을 마친 뒤 찾은 아버지의 고향 경남 고성에선 모호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깨닫게 됐다.

“그전까지 말만 한국인이었지 가슴 깊은 데선 그런 느낌이 없었다고. 대구 전국체전을 다녀와서 ‘확’변했지. 다음해 전주 전국체전 때는 누가 등 떠밀지 않아도 선수 겸 감독으로 출전했네."

1962, 1963년 전국체전에 출전한 재일동포팀은 대회 2년 연속 우승에 성공하며 수준 높은 야구를 국내에 전수했다.

“1963 년 동포 야구팀 멤버 가운데 서정리(작고)라고 있었네. 내가 데려간 친구지. 이 친구가 전국체육대회가 끝난 다음 그해 서울에서 열리는 아시아선수권대회 한국 국가대표로 뽑혔어. 자네가 알지 모르겠지만 한국이 처음으로 아시아선수권대회 챔피언에 오른 게 바로 그 대회였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당시 국가대표 선수들 가운데 4명이 재일동포였다는 거야. 신용균, 배수찬, 박정일, 서정리가 다 재일동포였다고.”

한재우는 지금도 재일동포 야구선수들이 모국의 야구발전에 기여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고 그걸 일생의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절친한 후배 김성근 감독의 SK가 한국시리즈에서 2년 연속 우승했을 때도 ‘후배가 우승했다’는 것보다 ‘후배가 한국야구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에 자기 일처럼 기뻐했던 그였다.

1963년을 끝으로 한재우는 야구와 다시 담을 쌓는다. 결혼과 아내의 출산으로 두 아들이 생기며 경제활동에 충실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구는 한 번 결박한 그를 좀체 놓으려 하지 않았다.

현역 은퇴 뒤 미즈노 스포츠용품점을 운영하던 한재우와 그의 아내. 뛰어난 경영수완으로 오사카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되는 스포츠용품점으로 성장시켰다. 재일동포 야구단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오사카의 거부(巨富)가 됐을 것이란 게 동포 사회의 평이다(사진=스포츠춘추)

1967년 봄. 평소 안면이 있던 재일한국야구협회 최태환(작고)이사가 한재우를 찾았다. 최 이사는 한재우를 보자마자 대뜸 “감독을 맡아 달라”고 읍소했다.

“1955 년부터 해마다 여름방학이면 재일동포 고교야구단이 모국을 방문해 친선경기를 벌였다 하더라고. 그런데 나더러 그 팀의 감독을 맡아달라는 거야. 스포츠용품점도 운영해야 하고 가정도 있는데 1달간 집을 비우는 건 곤란하다고 했지.”

하지만 이번에도 한재우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한국을 거의 모르는 재일동포 2, 3세들에게 방한 친선경기는 모국을 이해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할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라는 주변의 설득에 넘어간 것이다.

생 각지도 않은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감독을 맡은 한재우는 그러나 감독직을 맡자마자 갖가지 난제와 씨름해야 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문제가 경비조달이었다. 한 번 모국방문을 할 때마다 수백만 엔씩 소요되는 경비를 마련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재우는 재일대한야구협회 관계자와 백방으로 후원을 받기 위해 뛰어다녔고 마침내 유력한 후원자를 소개받게 됐다. 그런데 문제는 후원자가 유명한 야쿠자라는 데 있었다.

남(男)대(對)남(男)

재일대한야구협회 관계자의 손에 이끌려 한재우는 오사카의 대저택에 들어섰다. 두 사람은 정문부터 몇 단계의 엄격한 검문을 거친 뒤에야 안방까지 갈 수 있었다.

“어서 오시오. 반갑습니다.” 안방문을 열자 중년의 사내가 두 사람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상대의 손을 맞잡은 한재우는 그의 악력에서 보통사람이 아님을 느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재우라고”
“알고 있습니다. 한 선생.”
순간 한재우가 상대를 쳐다봤다. ‘날 안다고?’

“한 선생이 니시데쓰 라이온즈의 일본시리즈 3년 연속 당시 주요 우승멤버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오사카 동포 사회에서 한 선생을 모르는 동포가 누가 있단 말입니까.”
상대는 분명 ‘동포’라고 했다. 오사카에서 아니 일본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유명한 야쿠자가 ‘동포’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지난해 재일대한야구협회장에 용퇴한 한재우는 지금도 한국야구 발전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 당시 일본에 살던 한국인은 할 게 없었다고. 많이 배우길 했나, 돈이 많나. 거기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옛날에는 엄청나게 차별이 심했네.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와도 한국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으면 취직이 어려웠으니까.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지 않겠나. 연예인, 운동선수는 잘 풀린 경우고 많은 이들이 야쿠자에 가입했던 게 사실이네. 그이도 재일동포 야쿠자였지.” 한재우의 회고다.

당 시 한재우가 만난 야쿠자는 오사카를 근거지로 활동했던 야마구치구미(組)의 핵심인사였다. 지금도 일본 암흑가에선 복부에 총을 맞고도 야쿠자간의 전쟁을 지휘했던 그의 전설이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동포 사회에선 의적과 같은 인물로 통했다. 특히나 야구를 좋아해 재일동포 야구선수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사정은 들었습니다. 재일동포 모국방문 학생야구단이 예산이 없어 고생하신다고요.” 그가 차를 권하며 운을 뗐다. 
“예산이 없어도 우린” 한재우가 대답하려할 때 협회 관계자가 말을 낚아챘다.
“그렇습니다. 아이들 비행기 값도 모자라 자칫 모국행이 좌절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뒤 “그럼 한 번 방문 때마다 얼마나 경비가 듭니까”하고 물었다.
“350만 엔 정도가 듭니다.”
“350만 엔이라, 350만 엔이라. 음.” 짧게 신음소리를 내는 그를 보며 한재우는 괜히 왔다는 생각을 했다. 제 아무리 대단한 야쿠자라도 350만 엔이면 큰돈이었다.

“ 보통 모국방문을 할 때 20명 정도가 가서 한달 정도 있다 온다고. 왕복 항공비, 숙박비 그 밖의 경비를 모두 합치면 그 정도는 들게 마련이었네. 한국에서 지원을 한데도 대개는 동포들이 경비를 조달했네.” 한재우는 당시를 회상하며 동포 야쿠자가 했던 말을 잊지 않는다고 했다. 무슨 말이었을까.

“아이들이 모국을 찾겠다는데 돈이 길을 막아서야 되겠소. 내 도와드릴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시오.”

한 재우는 지금도 그와의 만남이 어제 일 같다. “동포 사회엔 못된 일 안했어도 일본인들은 그이를 무서워했다고. 야쿠자니까. 그런데 앞에선 총싸움을 하고 별짓을 다해도 뒤에선 그 냉혹한 양반이‘모국’말만 나오면 눈시울을 붉혔다고. 그이 같은 이들이 없었다면 재일동포 야구단의 모국행은 진작 중단됐을 거야.”

한재우의 회고대로 그의 지원은 1회에 그치지 않았다. 죽는 날까지 계속 됐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던 배경에는 이토록 피와 맞바꾼 돈을 쾌척한 동포 야쿠자들의 숨은 노력이 스며있었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감독시절 한재우는 선수 구성을 위해 일본 내 3천개에 달하는 고교야구부를 하나하나 조사해 동포 선수가 뛰는지 체크했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이가 있었으니 '오사카의 호랑이' 김박성이었다. 사진은 한재우가 깨알같이 작성한 동포 선수카드다(사진=스포츠춘추)

“이제 한숨 돌리나 했지” 당시를 회상하는 한재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하지만 이게 웬걸. 돌아보니까 출전할 선수들이 없지 뭔가. 민단계나 총련계 학교에서 차출하면 안 됐냐고? 허허. 당시 야구부는 주로 일본 학교에만 있었다네. 게다가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이 실력 없다는 소문이라도 나보게. 모국분들이 얼마나 실망하겠네. 그래, 믿기지 않겠지만 야구부가 있다는 일본 내 3천개가 넘는 고등학교를 모두 찾았다고. 지금 생각하면 무모했지. 암, 무모했어. 그래도 김박성 같은 선수를 모국으로 데려간 건 뿌듯한 일이였네. 자네도 김박성이라고 알지? ‘오사카의 호랑이’ 한신의 김박성 말이야.” (계속)

기축년(己丑年) 삼월 구일 늦은 저녁.
도쿄돔 플랫폼에는 어수선한 가운데 수 만의 사람들이 뱀직구를 시전하는 창용불패의 공 하나 하나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이미 봉중근 의사의 호투와 정현욱의 돌직구와 루헨진의 왼손 마구에 홀린 적은 창용불패의 꿈틀거리는 공 앞에서 쓰디쓴 침을 삼키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콜드패라는 치욕을 맛보았던 명장 김인식 감독 이하 코칭 스태프와 선수들, 그리고 5회 초까지 공을 뿌려대어 상대팀의 기를 눌러 놓은 봉중근 의사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1:0의 짜릿한 승리.

1라운드 1위를 결정짓는 멋진 승리.

상대를 함부로 여기면 안된다는 교훈마저 주었던 값진 승리.

이를 기념하여 LG트윈스에서 봉중근 의사의 기념 티셔츠를 제작하여 절찬 판매중이다.

http://www.lgtwins.com/mall/shopmall/shopmallList.jsp




봉미미라고 부른 놈들...다 봉중근한테 사과해라!

이젠 정말 봉타나다.
이대호 선수가 수비 부담이 좀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수비라면 아무래도 이범호 선수가 좋은데, 차리리 3~6번을 김현수, 김태균, 추신수, 이범호 순서로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데...파괴력은 아무래도 이대호 선수보다 떨어지지만 일본과의 시합을 3~4점 이내의 승부로 본다면 한국의 중심타선으로 충분히 커버할만한 점수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리고, 중요한 순간에 이대호라는 무서운 대타 요원이 생기는 셈이다.
(수비가 대타 이후 공백이 생길 시 내야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내야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최정으로 교체하고, 외야의 경우에는 이종욱 선수로 대체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일본전 선발 라인업은 다음과 같다.

1번 - 이용규(중견수, 좌투좌타)
2번 - 정근우(2루수, 우투우타)
3번 - 김현수(좌익수, 좌투좌타)
4번 - 김태균(1루수, 우투우타)
5번 - 추신수(지명타지, 좌투좌타)
6번 - 이범호(3루수, 우투우타)
7번 - 이진영(우익수, 좌투좌타)
8번 - 박경완(포수, 우투우타)
9번 - 박기혁(유격수, 우투우타)

1번에 이종욱 대신 이용규를 선발 기용해서 투수를 좀 괴롭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인데, 이용규 선수가 아무래도 공을 좀 많이 보는 편이기도 하고, 이용규는 내야와 외야 수비가 모두 가능하다는 점도 있다.

꽃보다 범호의 선발 기용으로 3번째 타석이 돌아오는 5~7회까지는 선발 등판하여 내야 수비를 안정시키고, 그 뒤에는 이대호 선수의 대타 혹은 교체를 통해서 후반 찬스를 잡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타선도 지그재그로 돌아가기 때문에 상대 투수도 좀 까다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뭐 어느 수준에 오른 선수들이기 때문에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늘 중국전에서 좋은 시합을 했으면 좋겠다.

일본과의 시합에서 대패.
시합을 본 느낌은 '일본은 강하다. 하지만 콜드 게임을 당할만큼은 아니다.'라는 생각.
아쉽지만 다음 시합을 준비해야 할 시간.

일단 타자들의 타력이 그렇게까지 떨어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3~6번까지의 타순이 시합이 진행될수록 점점 강해질 것 같다는 생각.

그리고, 1번 타순에 이용규를 넣는 것도 고려를 해봄직한데...아무래도 1~2번의 테이블세터 역할이 좀 부족한 듯 싶다. 뭐 정근우는 대만전 홈런 등 활약을 하기는 했지만, 1~2번의 빠른 발과 중심타선 연결 역할에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또 하나는 일본에게 무척 유리하게 짜여진 대회 일정표.
일본은 승리를 예상할 때 하루 걸러 시합을 하도록 되어 있고, 예선 자체를 같은 날에 진행하지 않는 이상한(?) 꼼수를 부렸다. 게다가 토너먼트 방식이 아닌 패자부활전을 반복하는 성격의 룰로 꽤나 피곤한 대회 진행 방식이다.

이런 대회에 참가하여야 하는가? 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것도 어짜피 극복해야 할 몫이기도 하고.

아쉬움과 당혹감이 남는 시합이었지만 다들 고생많았다.

내일은 중국전. 선발은 윤석민. 파이팅!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말이 있다.
하긴 남의 말이라면, 아니 자신에게 돈되는 말이 아니라면 안듣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니
주변의 민심이 어떤지 알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다.

특정 정당 및 관련 금수들의 말과 행동이
일반인이 상상할 수 있는 상식선을 이미 넘어섰고,
법과 원칙의 잣대가 고무줄처럼 이분 저놈 달라지는 탓에
한동안 할 말을 잊어버렸다.

아...이것은 재앙이다.
대한민국이 대한국민이 제 스스로 만들어낸 재앙이다.



4년이라는 긴 시간, 혹은 그 뒤에 희망은 있을 것인가? 라는 의문들.
최소한 인간이어야 하지 않는가?
코메디도 이런 코메디가 없다.

각하께서 갑자기 벙커에서 나오신 뒤 4일 과천 정부청사를 전격 방문해 소위 현장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주재했다고 한다.

"닌텐도 게임기를 우리 초등학생들이 많이 갖고 있는데 이런 것을 개발할 수 없느냐?" 며 이런(?) 게임기의 국산화에 관심을 가지셨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 지금 루리웹을 비롯해서 게임 사이트들, 그리고 각종 포탈들에서는 다양한 패러디와 폭소가 쏟아지고 있다.

왜 갑자기 닌텐도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셨을까? ...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게임황제 닌텐도 '불황속 질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301742445&code=970203

직접 읽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1월 말에 조중동문을 비롯하여 매경, 한경에 뜬 닌텐도 사상 최대의 매출 및 순익 기사를 보고 설레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링크는 조중동문은 무조건 제외다)

전세계가 힘들다 힘들다 말하는데...이거 순익을 펑펑내는 회사 이야기를 들으니 그저 솔깃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기사도 보았겠다, IT 뭐 이런거 비슷한 이야기하다가 생각나니 대뜸 말해버린 듯한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벙커에서 나오셔서 닌텐도 같은 것(?)을 만드는 게 어떻냐는 주문도 하시었다.

MB "닌텐도 같은 것 개발 못하나"
http://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336847.html


그런데...왜 이게 코메디일까?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보통신부를 없애버렸다. 뭐 IT 강국의 꿈은 늘 가지고 있어왔지만 이뤄지기도 전에 관련 부처가 없어진 것이다. (정통부 홈페이지는 방통위 홈페이지로 바뀐지 오래다) 예산이나 정책 등이 정보통신이나 IT에 전혀 관심이 없는데, 무슨 기술과 컨텐츠가 자라나겠는가? 이미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IT 경쟁력이나 IT 컨텐츠 사업에 관심이 없다는 점(혹은 이게 뭔지도 잘 모를 것 같다는 점)이 밝혀져 버린 것이다.

사실 문광부와 정통부 간의 게임 산업이 성장함에 따라서 이에 대한 두 기관의 알력 비슷한 것이 있기도 했고, 예산이나 인원이 분산되어 지원되는 부분들도 있다고 봐야하기는 한다. 합의과 절차를 통해서 그런 과정을 거쳤으면 좋겠지만, 정통부가 이번 정부가 들어서면서 없어짐으로써 결국 문광부에 흡수되면서 좀 이상한 단체 같은 것으로 변경이 될 예정이다.

첨단게임산업협회, 차세대융합콘텐츠산업협회로 명칭 변경
http://www.etnews.co.kr/news/detail.html?id=200811260140


뭐, 이런 것이야 그럴수도 있다. 정통부가 없어졌으니 산하 기관들을 없애거나 다른 방향으로 운영할 수 있다. 도움이 정말 된다면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아...이제 게임에도 낙하산 투하가 시작된 것이다.

게임위 차기 위원장은 'MB맨'
http://thegames.co.kr//main/newsview.php?category=101&subcategory=1&id=137448

살짝 간을 본 뒤에 '뭐 이정도면 이제 집어 넣으면 되겠군.'이라고 생각했는지, 중앙일보 논설위원에 대선 특보로 열심히 뛰어준 사람을 유력하다는 기사들도 도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집어 넣고 나서는 유력했던 사람이 되었다라고 하면 된다)

신임 게임물등급위원장, 이수근 신임위원 유력
http://www.asiae.co.kr/uhtml/read.php?idxno=2009020417441781680


그런데...말이다.
게임기를 만들라고 이야기하던, 자기 사람을 집어 넣던, 관련 부처를 깡그리 없애버리던...간에 뭐라도 하나 도와줘가면서 해야하는 것 아닌가?

게임 심의 수수료는 최대 10배까지 인상하면서 그 변명이라는 것이 궁색하기도 서울역에 그지 없을 뿐더러, 그 과정마저 현재의 정권과 어찌 그리 닮았는지...처음에 간보고, 맞다고 우기면서 홍보하고, 분위기 안좋으면 조금 바꿔서 다시 괜찮다고 하고...결국은 은글슬쩍 바꿔놓고...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게임 심의 수수료 인상, 예고된 갈등 ‘표면화’
http://www.gamemeca.com/news/news_view.html?seq=16&ymd=20090116&page=1&point_ck=1&search_ym=&search_text=

게임위, '심의수수료 인상 타당' 주장
http://www.gameshot.net/common/con_view.php?code=GA496fdd75a917a

게임물등급위 "심의수수료 중소업체 할인 검토"
http://it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388128&g_menu=020500


그동안 해온 것을 보면 게임업계를 살리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보이는데, 뜬금 없이 닌텐도 같은 것이라니?
기술과 컨텐츠, 그리고 아이디어 집약 산업인 게임이 하룻밤에 짠하고 나타날수 있으면 오죽 좋을까?

그래도 착한 네티즌들이 실제 만들수는 없어도 각하의 그 마음을 헤아려 상상력을 이용해서 패러디 물을 하나 둘씩 만들어 주고 있다. 이거라도 보시면서 '왜 우리는 닌텐도 같은 게임기를 못만들지?' 생각 좀 하시길 바란다.

'명텐도' 2nd Edition 정식 출시
http://ruliweb.empas.com/ruliboard/read.htm?num=34014&table=society_news&main=cmu&left=m

유저 동영상 - <놀러오세요, 대운하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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