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 되는데...다들 살아간다.

사실 살아간다는 건 아무 것도 아니다.

무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틈에 있을 뿐이지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무 것도 아니다.

동네 사진을 한 번 찍어야 겠다고 생각해서 낮에 집에서 나오면서 사진기를 들고 나왔다.

늘상보는 평범한 동네 풍경.

집 바로 앞에 있는 정교회 성당.

얼마전 하얀색 페인트를 다시 칠하고, 보수도 새로 해서깔끔하게 변했다.

특정 시간대에 종을 울리는데...동네에서 뎅뎅 울리는 소리를 들으면 좋다.

성당 맞은 편으로 길건너 공원.

집 쪽에서 공원으로 들어가는 초입으로 사람들이 비둘기들에게 먹이를 자주 주기 때문에 개체수가 날이 갈수록 늘고 있다. 멀리서 보면 괜찮은데...비둘기의 응가 장소 겸 식사 장소다.

공원 길.

밤에 계속 비가 내린 탓에 바닥이 젖어 있다.

토요일과 주일에는 한적한 공원길...한적해지는 도시 속의 공원길.

공원 길.

공원 내의 길은 크게 아스팔트로 된 길과 여기처럼 돌을 깔아서 만든 길이 있다.

저멀리 분수가 보이는 공원길...

공원 내 놀이터.

아이들이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 손을 잡고 와서 노는 공원 안의 놀이터.

톨스토이 동상.

톨스토이 거리를 지나 끝에 있는 이 공원은 톨스토이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옆 면과 뒷 면이 좀 손상되었는데...올 여름에 시멘트로 보수를 했다.

아무튼...비둘기의 안식처.

톨스토이 머리 위의 비둘기.

비둘기들이 쉬어가는 곳으로...응가를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마에 누군가 적어놓은 낙서가 흐릿하게 보이는 듯...

한 달 정도 뒤면 겨울이 오겠구나 한다.

일주일 전까지 더위에 땀을 어떻게 식혔는지 까먹을 만큼찬바람에 약간은 투툼한 외투를 꺼내 입고,

하루 하루 위기의 순간에 흥분하며 아침 하늘부터 저녁 하늘까지 두드리는 날들.

카레와 비빔밥을 동시에 만들어서 먹는 미묘한 주말을 보내고,

툭툭 떨어지는 빗소리속으로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간다.

할 수 있는 요리들이 점차 늘어가는와중에 독자적인 레시피들은 쌓여가고,

국적 불명의 웃기는 짬뽕 메뉴를 내놓는한식당을 하나 차려도 될까 생각해 본다.

미지와의 조우가일상이기에 미확인 생명체들과 같이 어슬렁 거려보고,

새로 제작될 UFO의 성능에 관한 백서의 목차를 타박거리며 써본다.

대학 다닐 때 조셉 보그스의 '영화 보기와 영화 읽기'라는 책이 나왔다.

당시 학교 도서관의 영화 관련 서적이란 한 쪽 책장 서 너 줄에 사진 관련 책과 함께 백 여권도 채 안되는 분량이었고, 새로 번역되거나 출판되는 책도 바로 사서 읽을 정도였으니...당시에 출판된 영화 관련 서적은 대부분 읽었다고 생각한다.

그 책의 내용은 자세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용 하나는 기억 난다.

영화를 보는 것과 영화를 읽는 것.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영화에 엄청난 관심과 이에 대한 산업으로의 사고가 대중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 나오기 시작한 씨네21, 키노들이 스크린과 로드쇼의 뒤를 이어갔고,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서 읽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영화를 이야기 하자.

일반인들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이제는 감독이 어떻게 그 장면을 이끌어 냈는 지를 토론하고, 스타일과 작가주의를 이야기했고 서사적 구조와 영화 속에 숨겨진메타포를 이야기했다. 편집과 사운드를 논하고 다들 20자 평을 쓰면서 드래곤 라자의 시니컬한 주인공처럼 토론을 하기도 했다.

영화는 해체의 시대일까?

정보의 과잉과 토론의 범람이 미디어와 인터넷이 가져다 준 선물인 것인가 생각해 본다. 우리는 언제부터 완성된(불완전하든 완전하든) 결과물의 구조체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면서 컨텐츠를 소비하기 시작한 것일까? 감상이라는 옷을 입고 해체된 각 부분들에 대한 논평을 늘어놓게 된 것일까?

나의 아픔은 구워진 빵의 맛을 음미하기 전에 그 밀가루와 이스트와 반죽을 논하며 빵을 먹는 이들을 보는 것이다. 그저 나에게는 '멋진 맛이거나 혹은 반죽이덜된 빵'일 뿐이다. 컨텐츠를 논쟁으로 소비하는 것은 평론가에게 역할을 주어도 될텐데 라는 생각이 든다.

네이버 글쓰기가 바뀌었군...억지 춘향...오늘의 일을 끝내다.

할 말은 많지만...도데체...

종종 그림을 그리고 싶어 진다.

며칠간 무지하게 덥더니 퇴근 시간이 다되어 검어진 하늘 사이로 천둥 번개가 내려치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 날은 원래 그림을 그리면 안될 것 같은데, 그림을 그리고 싶어 진다.

그리고, 엄마가 부쳐주는 김치, 부추부침개나 빈대떡을 먹으면서 애니메이션을 보고 싶어 진다.

성근이의 노력으로 우연찮게 만났고, 요즘은 만화를 안그리냐고 묻는다. 만화...고등학교 졸업한 뒤로 그려본 적이 없다. 사실 요즘 만화체와도 많이 다르고, 개인적인 만족보다는 굳어진 손과 손가락을 느낄 뿐이다.

엄마는 내가 집 안벽에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부엌의 한 쪽 벽면의 도배지를 뜯고하얀색 페인트로 칠해 주시기도 했다. 나는 그저 내 마음대로 그 하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면 된다.

하지만, 지금 하얀 종이를 꺼내 쓱싹 그리기 시작하면 실망할 거다.

현재의 내가 그려낼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에, 그리면서 다른 이들의 그림들과 비교하여 우울해질거기 때문에, 그려낸 것이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게 될 거기 때문에 실망할 거다.

그래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아랑곳없이 그림을 그려댔는데...뭘 모르는 것도 좋은 일이고, 뭘 모르는 채 계속 길을 가보는 것도 좋은 일인 듯. 하지만 머리가 굵어지고 나이가 들면 사람은 이것저것 따지게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게 이런 건가 보다 한다.



미니 기기들이 많아지다보니...이에 따른 부가적인 메모리 카드의 종류 및 숫자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뭐, 메모리를 예전 플로피 정도로 생각해서 쓰고 버리는 것으로 알고 있는 나에게 그다지 좋은 게 필요하지는 않지만, 용량은 점차 중요해지는 듯 하다.
가장 처음 구입했던 128M CF메모리부터 최근에 구입한 샌디스크 메모리 스틱까지 나란히 놓고 사진을 찍어 봤다.
구입 가격을 놓고보면...웃기는 것이 128M CF가 가장 높다는 것.(그 다음은 샌디스크의 메모리 스틱 4G)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사라질 녀석들이지만, 내 미니 기기들의 각종 데이터들을 담고 있으니 사용이 가능한 동안은 계속 열심히 일해주길 바란다.
항상 제일 싼 녀석들만 사서 그런 지 회사가 같은 녀석이 하나 밖에 없구나...
아무튼 다들 미니 기기들에 들어가서 잘 작동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 멀쩡했다.

KE923편에서 내려 서는 순간 이상해지기 시작한 것 같은 느낌.

공기의 이물감 혹은 기대하지 않게 다른 곳에 온 듯한 낯선 느낌.

왜 이렇게 뒤바뀌어 버린 것일까?

도착 후 아프기 시작해서 떠나는 그날까지 계속 몸의 이상 증후들은 계속되었다.

바보같은 짓을 계속했고, 반복하는 바보 짓에서 겨우 몸을 추스리는 정도.

도데체가 그걸 보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방이사님은 얼추 회사 내 정치에 대한 예언을 했고, 사람을 소개했고,

나는 결혼을 축하드렸고, 부조를 했고, 사람을 만났다.

결국 사람 사는 패턴이 크게 차이가 없기 때문에

경험있는 사람들의 조언과 평가는 어떤 형태로든 가치가 있다.

어느 정도 적중한 예언과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

역시나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람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지독스러운 개인주의와 무책임한 별나라 여행.

도대체 그 시작을 어디에서부터 찾아야만 하는 것일까?

잘못된 것인지 잘된 것인지 나의 어리석음이 새로운 것들을 가져다 주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인생이나 삶이라는 것도 모두 시간에 종속이 되어 있다. 이놈의 시간이라는 것이 지금의 현재를 가리키는 순간에는 나에게 어떤 강한 힘을 가지지는 않는데, 흐를수록 지날수록 큰 힘이 되어 압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가지게 한다. 사실 일상의 시간이라는 것은 무책임한 나의 태도와 습관을 반영하여 흘러가는 것이기에 지나고나면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게 만들곤 한다. 갈림길이나 분기 앞에서는 선택적인 의지가 발동하고, 이에 맞게 결정하여 몸과 생각을 움직인다고 생각하여 왔지만 그게 정말 스스로의 의지인지에 대하여 물어보지 않을수 없다.

나. 하나의 사고하는 형상물인 나는 결정을 내리는 진정한 주체인가?

외부적으로 보여지는 나는 외모라는 외피의 특이한 형상을 띄고, 이 형상을 통해서 타인의 영상 이미지에 각인이 된다. 그 외에 습성과 태도, 말투, 혹은 일상과 업무 상에서 표출되는 다양한 비이미지화된 감각으로 추가적인 정보를 내보내고 있다. 이러한 수 많은 정보들도 그것 자체로는 '나'라는 형상이 빚어내는 실체를 보기보다는, 외부적인 요인과 비교 및 분석, 그리고 동시대의 관습과 평가 등에 의해서 가공되는 정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행위의 근간에도 이러한 정보가 스며들어서 '나'라고 불리는 형상물의 외피와 함께 저장되는 여타 정보의 내용물이 결정되어 진다. 이 특이한 외부 요인과 '나'는 지속적으로 동일 시간대를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나'라는 특이 존재의 결정이 '나'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인지 '나'는 궁금증을 갖게 되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

관계들과의 연관성을 천천히 되짚어보면, 연결고리의 애씀없이 그저 흘려보내는 일상이 주된 흐름이었다는 것과 철저하게 개인주인적이고, 게으른 하루에 만족하는 생활을 해왔기에 이것에 대한 인지는 하루의 일상사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인지하기 위해서 시각화하는 장면의 대부분은 하늘의 흘러가는 구름이나 길을 달리는 자동차나 끊임없이 재생되는 MP3의 LCD 재생 화면을물끄러미 쳐다보는것처럼 반복되는 일상의 지나간 잔상들을 계속 읽어댄다. 이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이 흐름의 끝에서는 '나'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가?

때가 있다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때를 맞춰서 일을 진행하고, 이를 받아들여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침, 점심, 저녁 세 끼의 식사를 하고, 아이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의 때를 맞춰서 그 때에 걸맞는 과정을 겪으려고 한다. 당시 사회가 보여주는 기본 규범에 맞게 '때'는 그렇게 맞춰지고 사람들은 그 과정을 잘 겪었는 지로 '나' 혹은 다른 이들의 사회적인 범위를 규정해준다. 특정한 때를 놓친 사람들도 있고, 혹은 때맞춰 잘 과정들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때'라는 것은 특정한 규범이 되는 것인가?

몇 가지 궁금한 일들에 대하여 질문을 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시간이 모두 지나가 버려서 '나'라는 존재가 '때'의 과정을 모두 거쳐서 이제 시간의 흐름이 멈추게 되면 나는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인가? 작은 방에 우두커니 앉아서 생각해본 그 시간의 멈춤은 단지 '어두움' 뿐이었다. '정지'. 사람들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불렀고, 어머니는 그것이 영원한 곳인 '천국'으로 가는 시작점이라고 불렀다.

탐욕스러운 하루. '나' 역시도 그 속에서 밤낮으로 눈을 꿈뻑이며,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역시나 지겨운 하루. 신호와 프로세스가 종료되기 전까지는 지속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프로그램처럼 움직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소비의 대부분을 타인을 의식해서 하곤 한다.

타인 혹은 집단 의식 속에서지출과 수입이 많이 결정되는데,

이러한 부분이 소득이 커질수록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선택과 결정에 이르기까지 마지막행위에 있어서는스스로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스스로'의 선택점과 기준은 타인에 의해서 만들어 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 자율적인 행위에 의한 것일까?

일반적인 욕구.

배고픔, 성욕, 수면 욕구 등 동물적인 본능에 의한 것들도

이러한 테두리 안에서 취사되고, 선택되는 상황이 증가한다.

이 모순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상한 유형으로 분류되거나

그러한 집단과 타인의 시선에 적합하지 않은 상태를 가진다고 여겨진다.

패션쇼의 진실은

내가 멋진 옷을 입고 기쁨에 젖는 것을 떠올리는 것이아니라

남들의 시선을 받는 자리에 있는 것을 상상하며 기대하는 것이다.

침흘리는 늑대와 여우들 속에서 하나 둘씩 떨어지는

브랜드의 보여주기 상상력을 그저 하나 얻고 싶은 것 뿐이다.

소비는 기능성보다 너무 많이 이미지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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